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7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= [[신민당(1967년)|신민당]]의 [[40대]] 기수론 === 한편 3선 개헌 저지는 물론 개헌 가부 국민 투표에서도 지자 야권은 무력감에 빠졌다. 야권의 대통령 후보 중 제일 인망이 있었던 건 [[유진오]]였는데 환갑이 넘은 나이에다 심지어 와병 중이었다. 그 때 41세의 [[김영삼]]이 무력한 '''[[신민당(1967년)|신민당]]'''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다. [[1969년]] [[11월 8일]] 당시 '''41세'''의 '''4선''' 의원[* 1954년 '''26세'''에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[[국회의원]] 당선 기록이다. 그 와중에 총선에서 1번 낙선한 적도 있었으니, 42세의 나이에 총선에 5번이나 나와 4번 당선된 거물급 중진 의원이었다.]이었던 신민당 [[원내대표|원내총무]] '''[[김영삼]]'''이 남산 외교구락부 건물[* 2008년 철거되었다.]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. 뒤이어 1970년 1월 24일 '''45세'''의 '''3선''' 의원 '''[[김대중]]'''이, 2월 12일 '''48세'''의 '''3선''' 의원인 '''[[이철승]]'''이 각각 출마를 선언했다. 신민당 수뇌부 뿐만 아니라 [[박정희]] 조차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. 김영삼의 출마선언에 저런 풋내기와 상대해야 하냐면서 [[김계원]] [[중정부장]]에게 [[유진산]]이 후보가 되도록 공작하라고 했다고. 범진산계의 [[양일동]] 부당수는 전당대회 3주 전인 1970년 9월 초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70090500329201022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70-09-05&officeId=00032&pageNo=1&printNo=7668&publishType=00020|인터뷰]]에서 "40대 후보들에게 지명대회를 맡길 수는 없다, 또 그들에 의해 지명대회가 이끌려서도 안 된다, 당의 꼴이 엉망이 된다"며 1967년 대선처럼 [[윤보선]]·[[이범석]]·[[백낙준]]·[[유진오]] 등의 4자 회담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거나, 대의원들로 이뤄진 후보조정위원회를 통해 후보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. 그 밖에도 [[유진오]] 전 총재가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70091800099201019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70-09-18&officeId=00009&pageNo=1&printNo=1392&publishType=00020|9월 17일]] 대통령 후보 출마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"경선은 할 생각이 없지만 추대를 해준다면 나서겠다'' 등이 당시 신민당 노장층의 인식 수준이었다. 당 내에서는 이미 '''40대 기수들'''에게 환호하고 있었다. 유진오는 당수를 내려놓고 일본으로 떠났고, 당수직을 이어받은 유진산도 당내 최대 계파를 이끌고는 있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입후보를 허용했다. 단, [[김영삼]], [[김대중]], [[이철승]]이 후보단일화를 못하면 자신이 출마하거나 혹은 대선 후보를 지명하겠다고 선언했다. 결국 [[유진산]]은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고 그대로 당선되는 줄 알았으나..... [[1970년]] 9월 [[신민당(1967년)|신민당]] 임시전당대회에 대통령후보 지명 투표에서 총 885표 중, [[김영삼]] 421표, [[김대중]] 382표, 기권 78표로 과반을 확보하는데 실패해 결선 투표에 들어간다. 결국 [[유진산]]에게 배신감을 느낀 [[이철승]]이 표를 몰아주는 바람에 [[김대중]]이 458표, [[김영삼]] 410표로 [[김대중]]이 신민당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 후보로 공식 지명된다. 그리고 [[김영삼]]은 결과에 승복하고 [[거제도]]를 비롯한 영남을 돌며 대선 동안 [[김대중]]의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. 훗날 김영삼은 "2차 투표 때 [[이철승|소석]]과 DJ가 (둘 다 호남 사람이니) '[[우리가 남이가|우리가 남이냐]]'며 연합했다. 이후 나는 '배알도 없느냐'며 울먹이는 우리 측 사람들을 달래며 DJ를 지원했는데 DJ는 내게 선대위원장을 시켜주진 못할 망정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완전히 나를 배제시켰다"고 술회했다. [[https://news.joins.com/article/3790444|인터뷰]] || [[파일:attachment/Kim_n_Kim.jpg|width=100%]]|| || [[김대중]]에게 [[경선]] 패배를 인정하며 지원을 약속하는 [[김영삼]] || 이 세 명의 '''40대 기수'''들은 이후 '''[[대한민국 제4공화국|제4공화국]], [[대한민국 제5공화국|제5공화국]]'''을 거쳐 [[야당]]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으며, 특히 [[김영삼]], [[김대중]]의 양김은 끝내 모두 '''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'''에 올랐다. 자세한 이야기는 [[양김]] 문서 참조. [[김대중]]은 후보 선출 당시 만 46세, 대선 당시 47세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[[민주당계 정당]] 역사상 최연소 대선 후보 기록이자, 역대 두 번째로 젊은 거대 정당 대선 후보이다.[* 1위는 [[제5대 대통령 선거]]에서 만 46세의 나이였던 [[박정희]] [[민주공화당]] 후보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